gayoung0824@hotmail.com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방황하기

무엇을 하는 것이 맞는가. 이것을 하는 것이 맞는가, 저것을 하는 것이 맞는가. 사실 생각해 보면 맞다 틀리다의 개념은 맞을 때도 있고, 또 틀릴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두고 우리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마음의 장난인 것이 틀림없다.  무엇을 하는 것이 맞는가. 마치 길 잃은 강아지인 양 이 길도 가 보고, 저 길도 가 보지만 정작 내가 즐거움과 환희를 느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무언가 특정한 ‘것’이어야만 하는지, 아니면 어떤 ‘순간’인 것인지. 이것이어도 되고, 저것이어도 되겠지 싶지만, 답을 찾아내려다가 그만 생각 속에 파묻히고 만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어 원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 지경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어려서 부터는 유치원과 학교에서, 성인이 되고 나서는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언젠가 특정한 사회에 속하지 않은 스스로를 발견할 때, 자신은 과연 누구인지 알아챌 수가 없다. 스스로가 낯설기만 하다. 직업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정의하다가, 그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나’를 잃어버린다.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사회 속에서 소속감과 연대감이 깊어지면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고 싶어진다. 인정받고 싶고 보상받기를 원한다. 건강한 정도의 동기부여라면 괜찮지만 정도가 과해지면 이기심으로 이어진다. 당연한 듯 받아들여질 지 모르지만 분명히 우리에게 독이 된다. 만약 타인들을 감동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나 의무가 없다면, 특별해 져야 할 이유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항 종류의 꽃이 존재한다. 꽃들은 누가 누구에게 뒤지지 않고자 노력이라도 하는 듯 모두가 하나같이 아름답다. 하지만 이들이 아름다운 진정한 이유는 노력없이 발휘되는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때문인 것이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의 특별함을 뽐내려 하지도 않고 무슨 보상을 받기 위해서 아름다우려 하지도 않는다. 우리도 만약, 타인앞에 인정받고 당당해 지기 위해서 기를 쓰고 노력하여 특별해 지려고 하기 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스스로가 만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보상받기 위한 노력으로 얻은 특별함보다 훨씬 더 화려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도 볼 수 있는 눈이 자라나지 않을까. 무엇을 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고민은 어쩌면, 자꾸만 내가 나를 평가하려는 습관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과, 해서 남의 눈에 더 잘 보일만한 것, 이 둘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 고민에 대한 답은 내가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여부에 달린 것이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정직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남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그러나 스스로에게는 정직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결국에는 용기의 문제이다. (2014년 2월 19일)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방황하기 Read More »

생각의 창고를 열 금고 열쇠 바늘

생각의 습관이 굳어지면 가장 먼저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긴다. 생각의 습관이 굳어지면 자연스레 사고의 문이 좁아진다. 이런 상태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종일관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생각의 습관은 생각하는 방법이 어떤 훈련을 통해 굳어진 결과이다. 은행에 있는 커다란 금고를 열기 위해서는 금고 열쇠의 바늘을 면밀하게 조정하여야만 가능하다. 이렇듯 생각의 바늘도 면밀히 움직여 커다란 생각의 창고를 열 수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식탁에 놓인 컵도 정면으로 보거나, 측면으로 보았을 때 빛의 각도와 컵에 그려진 문양에 따라 달리 보인다. 늘 보던 컵도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을 보는 눈도 달리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만 각도만 바꾸어도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사고의 문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는 힘을 기른다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새로운 가능성과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문화는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 한들, 유교사상은 한국인의 생각의 뼈대이고 인간됨을 판단하는 뿌리이다. 우리만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가지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지만 개인이 유교적 체제 속에 종속된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여기에서 새로운 시각을 키울 가능성을 방해한다는 유교사상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난다. 공자는 인간의 자연스러움 보다는 노력을 통해서 더 나은 사회 구성원으로 거듭나는 철학을 창조했다. 무엇이 이 ‘더 나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지도 공자 자신이 창조했다. 그의 철학은 자기수양을 목표로 하는 중요한 교훈을 남긴 것은 맞지만, 그 목적이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있다. 개인보다도 집단의 번영에 최종적인 가치를 둔 것이다. 집단의 발전에는 큰 성과를 낼 수 있겠지만 개개인이 가진 다양성의 장점은 쉽게 지나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다양성은 한 국가가 사회의 틀을 갖추는 단계를 넘어서서 그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각 개인이 가진 다양성이 발휘될 수 없으면 사회는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없다. 사회의 행복의 척도도 개개인의 행복의 척도에 달려있다. 자신의 삶에 행복과 평화가 없으면 사회에 행복과 평화도 존재할 수 없다. 삶의 변화의 씨앗은 개인에게서 사회로 옯겨지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튼튼한 건물의 뼈대가 가장 밑에서 다져져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유교사상은 위로부터 시작되어 아래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가가 혼란스럽고 그래서 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때에는 매우 적절한 사상이다. 그러나 사회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시민들의 삶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 때에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은 사회로부터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삶에 여유가 생기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삶을 일구어 나갈 능력이 있지만 사회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고 나중에는 정치, 경제적 구조를 탓하면서까지 변화를 요구한다. 여러가지 사회 문제는 이런 오래된 문화의 찌꺼기와 현대 문명의 발전된 생활 방식이 서로 부딪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변화를 위해서는 오래된 문화의 찌꺼기와 현대 문명 둘 다 어떤 합의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문화를 탓해서만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현대 문명의 문제점만을 탓해서도 안된다. 둘 다 조정이 필요하고 개선이 필요하다. 사회와 문화만을 탓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사회와 문화에 불만이 있다면 각 개인이 먼저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손가락을 밖으로 향해 내밀어 비난할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가슴으로 돌려야 한다. 사회가 시민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관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우리가 먼저 서로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지금 당장 어떤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미래에 다가올 조화로운 사회를 생각하면서 바로 지금, 변화라는 선택을 해야 한다. 개인의 인생이 진화하면 사회도 진화한다. 조화로운 사회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개인의 조화로운 삶이라는 씨앗을 심어야만 한다. (2014년 1월 31일)

생각의 창고를 열 금고 열쇠 바늘 Read More »

똥파리가 되어 방황하다

부쩍 날씨가 더워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 점심식사후 축 쳐진 머릿속은 똥파리 날아다니듯 이런 저런 생각들로 멤돌고 있다. 배가 불러 속이 더부룩 하고 높은 온도에 뜨거운 바람까지 부니 뇌가 익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뭔가 글귀가 떠오르거나 쓰고 싶은 주제가 생각이 날 때면 재워두었다가 나중에 써야지 써야지 하고만 생각하다 어느새 그 생각은 사라져 버리고 멍하니 잡생각들이 그 자릴 메우곤 한다. 뭔가를 써야지 하며 생각만 하다가 재워둔 생각들은 하찮은 잡생각 찌꺼기의 분비물인 마냥 서서히 사라지고 만다. 꽤나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지만 최근들어 일기 쓰듯 써 내려가는 글을 통해 나도 몰랐던 나의 생각과 그 동안 얻었던 교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을 떠나 모험하는 삶을 살아온 지난 8년 동안 참으로 다양한 경험을 했고 이 경험들은 피부로 맞닿아 부딪혀 보고 쪽박나듯 깨져봐야 만이 참된 성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가르쳐 주었다. 대학교 강의를 들으며 배웠던 지식들은 유용하긴 했지만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한 듯 했다. 시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무런 이론적 체계를 내놓지 못했다.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데에는 교과서적인 방법론이 존재할 수 없듯 인간의 삶 또한 크게 다름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나무가 목이 마르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뿌리를 내리듯, 삶 또한 나에게 필요한 경험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곳으로 나를 인도했다. 꽤 오랫동안을 방황아닌 방황을 했나보다. 아니 지금도 방황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한국땅을 다시 밟았을때는 반가움이나 안도감보다는 혼란스러움과 어색함으로 항상 마음과 정신이 불편했다. 그 안에 서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지 스스로가 낯설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집단에 속한다고 느낄 때 안정감을 가진다. 익숙함을 통해서 마음은 편안해지고 말과 행동도 자연스러워 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이 소속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태어난 나라에서 소속감을 느끼기 보다는 몸과 마음이 편안히 숨쉴 수 있는 자연에서 그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라는 불확신과 불편함은 계속해서 나를 방황하게 했다. 자꾸만 편안함과 안락함을 찾고자 애썼다. 이때문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다. 이 와중에 정처없이 떠돌듯 여행인지 방황인지를 하면서 나도 모르는 또 다른 ‘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자꾸만 어딘가에 ‘속할’ 곳을 찾아다니기 보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낯선 땅에 아무것도 모른채 여행하고 방황했던 지난 날 동안에도 ‘나’라는 사람은 늘 그곳에 있었다. 나는 이미 속해 있었다. 이 세상에 이미 속해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더니, 어디선가 불쑥 살아갈 힘이 솟아났고 한 숨 한 숨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 마저 고맙게 느껴졌다. 하루를 소중히 여길만한 겸손함도 얻었다. 산들바람이 정처없이 불고 지나가듯 마음도 정처없이 흔들리는지라 늘 이런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지만,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2014년 1월 31일)

똥파리가 되어 방황하다 Read More »

어른이 된다는 것

두려운 것이 있다면 나는 무엇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인가. 걱정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무엇때문에 걱정을 하는 것인가. 어떻게 보면 다 다치지 않으려는 욕심, 모든 것들을 내 뜻대로 하고픈 욕심 때문인 것은 아닐까. 바꿔서 생각해 보면, ‘조금 다치면 어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어때’..라는 마음가짐을 가져본다면, 세상 만사가 좀 더 쉬워지지는 않을까. 완벽하게 하고자, 모든 것들을 ‘잘’ 하고자 하는 강박관념들 때문에 오히려 생각만 많아지고 숨만 가빠지는 것 같다. 때로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피어나는 아름다움이 있듯, 조금은 느슨해 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가 좋게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이런 것들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2014년 1월 7일)

어른이 된다는 것 Read More »

행복하기 위한 용기

한 동안 마음의 그릇이 얼마나 차 있었는지 층에 층을 더하는 음식을 쌓아놓듯 꽉 차 있다. 더이상 쌓을 공간이 없을 만큼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나 보다. 하나를 덜어내면 또 다른 하나가 보이고, 또 하나를 덜어내면 또 다른 하나가 보이고… 이유없이 머리로만 바쁜 탓일 게다.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조금씩 그릇을 비워 본다. 비워낼 수록 그릇은 가벼워 지고 점점 바닥에 가까워 진다. 마침내 그릇의 바닥이 보이고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릴 때에 그 본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의 짐과 정신적 부담이 조금씩 사라지는 이 순간, 이전의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살아왔는지 다시금 뒤돌아보게 된다.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며 ‘그때는 왜 그랬을까’하는 생각, 미래의 일들을 예측하고 계산하며 ‘이렇게 해야지’하는 생각 등, 망상에 가깝다 싶은 생각들로만 가득했던 나날들은 지금 이 순간 까마득히 잊혀진 채 무심히 사라지고 있었다. 꿈과 희망을 가지고 다시 디뎠던 땅은 너무나도 딱딱하고 마른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마치 정신이 분열되기라도 한 것 처럼 나도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채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도대채 숨은 쉬고 사는지, 잠잠했던 바다에 커다란 태풍이 들어 집채만한 파도에 휩쓸린 작은 돛단배와 같은 나날들을 보냈던 것만 같다. 항상 가득 차 있는 그릇마냥, 마음도 무겁고 갈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무엇부터 집어야 할 지 우왕좌왕했던 시간들. 쫓기고 눈치보며 살았던 시간들은 마치 나를 시험하는 듯 가슴을 짓눌렀다. 미소 가득한 얼굴에다 ‘저 사람은 뭔일이 있기에 저렇게 밝게 웃는걸까’하는 듯한 표정으로 차가운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의 시선. 이 모든 것들은 고독함만을 가져다 줄 뿐이었다. 그런 생활이 이어질 수록 늘 머릿속을 내치는 질문은 ‘인류는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였다. 신비로 가득한 이 우주에 존재하는 인류가 이렇게 서로에게 차갑게 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괜찮은 걸까? 숲속에서는 온갖 종의 나무와 식물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데 인류에게는 과연 조화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생명체인 인류. 우리는 그 지능을 한껏 발휘하며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삶은 잘 닦여진 고속도로를 타듯 편안하고 무난하지만은 않다. 살아가면서 난관을 만났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어떤 외부적 요소들이 서로 충돌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의지와 외부적 요소들을 절충하여 저항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는 대신에, 자신의 의지를 고집하여 끝까지 밀고나가는 경우가 많다. 밀면 밀 수록 충돌은 더욱 거세지기만 한다. 결과는 둘 중 하나이다. 모든 것이 망가지거나 다른 중요한 무언가를 희생하면서까지 ‘성취’ 하는 것. 전자를 선택하든, 후자를 선택하든 그것은 자신에게 달린 일이다. 결과 또한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돈’에 대한 숭배는 개인의 의지와 외적 요소들이 늘 충돌하게 만든다. 어떻게든 더 많은 돈을 벌고 저축하기 위해 우리는 안간힘을 쓴다. 높은 임금의 직업을 얻기 위해서 유치원 시절부터 교육열은 시작된다.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교육을 받은 우리의 아이들은 성장해서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하려 하지만 세상에는 넘쳐나는 고급인력들로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식의 삶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양측의 힘이 커질수록 저항력은 강해진다. 부를 얻으려는 의지는 커져만 가고 현실은 그것을 실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 지고만 있다. 이 충돌은 그 세기가 더욱더 막강해 진다. 문을 잠근 자물쇠는 점점 더 조이고 우리는 그 문을 열기 위해 밀고 있다. 문은 결국 부서지고 말 것이고 우리는 다치게 될지도 모른다. 성공에는 한 가지 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이란 단어의 의미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성취한 삶도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먼저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행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행복은 단순히 기분좋은 경험만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일 수 있다. 행복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난(충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을 기회로 여기는 것, 고난 앞에서 겸손해 질 수 있는 힘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느껴지는 기쁨은 행복이면서 동시에 삶의 가장 원시적인 원리일 수도 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행복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을 때, 우리는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홀로 걷는 삶을 살다, 다시 돌아갔던 그곳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댓가를 치뤄야 하는지를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가득 채워진 마음의 그릇을 결국에는 반드시 비워내어야만 했던 것이다. 욕심과 혼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던 그릇은 반드시 다시 비워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정직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몸의 안락함은 주었거니와, 마음으로는 뭔지 모를 불편함을 주었던 그곳에서 나는 다시 용기를 가져야 했다. 행복해 질 용기를 다시 찾아야만 했다. 행복은 어쩌면, 나약해 지면 얻을 수 없는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얻고자 하는 갈망과 배고픔이 없이는 쉽게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행복해 지고자 하는 의지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저항과 충돌 속에서 더욱 견고해 져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항과 충돌을 만나면서 우리는, 살아가는 이 삶, 한 숨, 한 숨 쉬며 살아가는 이 순간들이 얼마나 값지고 가치있는 것인지 깨닫게 될 지도 모른다. 한 발, 한 발 움직일 때 마다 부딪힘의 연속이었던 그 땅에서의 생활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릇이 비워지듯 마음의 매듭도 풀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하나 하나 되짚으며 건져낸다. 그 안에는 계속되는 충돌로 생겨난 고름들로 가득했고 아직까지도 계속 짜내고 있다. 천천히 다 걸러내어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 기다릴 참이다. 빈 그릇 하나만 달랑 남는 그 순간, 내 앞에 놓여진 현실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진실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월 27일)

행복하기 위한 용기 Read More »

살아있음을 깨닫는 순간

살아있음을 깨닫는 순간 깨어있건, 잠에 들어있건 상관없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는 보이지 않는 미묘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에너지의 움직임은 잠을 자건, 일을 하건, 운동을 하건, 쉬지 않고 계속된다. 마치 지구가 쉬지 않고 태양을 돌고, 달이 쉬지 않고 지구를 돌 듯 말이다.   겉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는 물질이 보이지 않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쫓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자동차는 석유을 먹으며 움직이고 컴퓨터는 전류의 흐름으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나무가 나무가 된 원동력은 무엇이고, 꽃이 봉우리를 피우는 힘은 어디에서 왔으며, 나아가 인류는 무엇을 기반으로 하여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일까. 기계는 연료와 전기가 원동력이 되지만 생명을 가진 존재에게는 무엇이 원동력이 되는 것일까.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이 ‘미묘한 에너지’는 지구를 공전, 자전하게 만들고 다른 행성들을 움직이게 하는 우주적인 힘, 에너지이다. 생명이 존귀한 이유는, 우리가 존엄한 이유는 바로 우주가 낳은 그 에너지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는 창조의 힘이며 신비이다. 여태까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었고 증명해 낼 방법도 뚜렷하게 없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이 힘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쉽게 증명될 수 있다. 생명이 존재하고 행성이 존재하며 태양과 달이 존재한다. 그리고 인류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위대한 증거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미묘한 에너지’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요시 여기다 보니 우리는 머릿속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살아간다.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신체적, 정신적 병들이 생겨나고 뭔지 모를 이유로 고통을 받으며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생명은 창조의 힘을 가지고 있다. 생명은 우주적 신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과 엄청난 지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이는 것들에만 홀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기계에 더 큰 의지를 하고, 그래서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기계의 힘에 의지를 하면 할 수록 인류는 존재의 가치와 존엄성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감동을 받는 때는 언제일까. 철저하게 계산된 겉모습, 보이는 것들에 의해서 감동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진실로 감동받고 진실로 행복하여 가슴에서 흘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할 때, 그 순간은 어떤 순간인 걸까.   그 고결하고 신비한 ‘미묘한 에너지’ 안에서 인간의 마음은 움직이고 그 마음으로 우리는 다른 생명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을 베푸고 나눔으로써 우리는 이유없는, 조건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인류는 살아 숨쉬는 것이다. 살아 숨쉰다는 것은 우주의 신비로움이다. 인류는 우주의 신비로움을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이 기계와 인간을 구분짓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다.   미묘함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 수록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함을 느낀다. 이것을 느낌으로써 다른 생명들의 중요성도 깨닫게 된다. 이 ‘미묘함’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이며, 신비이다. 이 신비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그렇기에 우주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미묘함’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가장 기본적인 에너지원이다. (2014년 1월 11일) 2012년, 노르웨이 피요드, 해질녁에   #인공지능과 인간, 인공지능과 인간의 차이/관계/공존/미래, 인공지능과 뇌, 인공지능과 윤리, 인공지능과 미래사회, 인공지능, 인공지능의 문제점, 기계와 인간, 기계와 인간의 공존, 기계와 인간의 차이, 인공지능과 사회문제 다른 게시글 All Posts Blog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방황하기 생각의 창고를 열 금고 열쇠 바늘 똥파리가 되어 방황하다 어른이 된다는 것 행복하기 위한 용기 살아있음을 깨닫는 순간 Copyright © 2025 소요유 – 자유로이 한가롭게 노닐다 | Author: Gayoung Yoon

살아있음을 깨닫는 순간 Read More »